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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당시 악명 높았던 겨자 가스의 6가지 진실


우리 인류는 이미 오래전부터 화학물질이 사람에게 치명적인 살상무기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창이나 칼 끝에 독약을 바르는 방법은 청동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비소를 섞은 연기, 유황 등을 태운 독성연기, 고춧가루를 바람에 날리는 등의 방법 등은 고대시대부터 각 나라별로 시행되어져 온 방법이다.



1914년 7월 발발한 제 1차 세계대전은 초기부터 화학전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독일은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최루가스를 시작으로 염소가스 살포, 염소가스와 포스겐을 혼합한 독가스를 연합군에게 살포하기 시작한다.  분노한 연합군은 '헤이그 협력' 위반이라고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연합군 또한 포스겐을 양산해 맞대응을 하기 시작한다. 포스겐은 제 1차 세계대전 기간동안 가장 많이 사용되었고 약 8만명 이상의 군인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독일군은 당시 포탄에 담긴 독가스의 규제만 존재할 뿐 실린더를 이용한 직접 가스 방출은 헤이그 협력 위반이 아니라는 궤변을 늘어놓게 됨.   


이후 양쪽은 치열하게 화학전을 벌이게 되며 독일은 더욱더 강력한 화학무기를 개발하게 된다.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시 가장 악명 높았던 '머스타드'라고 불리는 겨자 가스이다. 약하게 풍기는 겨자 냄새와 연한 노란색을 제외하면 일반적인 포격에 쓰이는 방식이라 연합군이 눈치채기 어려워 의문의 독가스로 인한 사상자는 크게 늘어나게 된다. 연합군은 독일군의 보급창고를 점령하고 나서야 이 가스의 정체를 알수 있게 된다. 지금부터 이 끔찍한 대량 살상무기였던 겨자 가스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6가지 사실을 이야기 해본다.


1.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겨자 가스를 연구


겨자 가스는 1917년 처음으로 독일이 선보였지만 사실상 연구는 18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알버트 니만(1859년 코카인을 발견한 사람)이라는 독일의 화학자가 독성에 대한 특성을 처음으로 기록하게 된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인 1913년 독일 베를린에서 독일 과학자와 영국 과학자가 실험을 하던중 이물질이 들어있는 플라스크가 깨지면서 중독되는 사건을 계기로 독일은 즉시 겨자를 이용한 화학무기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2. 제1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도 겨자 가스를 비축 / 사용


연합군은 독일의 겨자 가스 사용에 반발했지만 즉각적으로 대응하여 겨자 가스의 물량을 조직적으로 비축, 사용하기 시작한다. 1918년 독일 힌덴부르크를 돌파한 것도 사실상 연합군의 겨자 가스 공격의 힘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독일은 포탄 뿐만 아니라 로켓트, 자유낙하 폭탄, 박격포, 지뢰를 이용하여 겨자 가스를 전달하는 시스템을 개발


어느 한 추정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해 영국 군대는 겨자 가스 사고를 2만건이나 겪었다고 한다.



4.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은 겨자 가스 및 화학 무기를 비축


1943년 12월 3일 독일의 이탈리아 바리 공습으로 겨자 가스 2,000개가 실려있던 미국의 공급선이 손상을 입어 엄청난 양의 겨자 가스가 유출이 되었다. 이로 인해 해군 600여명, 시민 1,000여명이 몸에 물집이 생기고 눈에서 진물이 흘러 나오는 증상을 겪게 된다. 당시 연합군 사령관들은 독일군이 대응하여 화학무기를 사용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모든 사실을 숨기기에 이른다. 이 사건은 추후 암 치료법을 개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5. 겨자 가스는 치명적인 살상 무기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겨자 가스의 에이전트(작용제)에 노출된 사람의 1 ∼ 5%만이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인들이 두려워 했던 이유는 자신이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겨자 가스는 피부에 침투해 물집과 같은 화학적 화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즉사할 정도의 치명적인 살상가스는 아니었다. 다만 넓은 범위의 신체에 피해를 입으면 생명을 잃을수 있고 장기적으로 암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6. 겨자 가스로 인한 최초의 항암제 개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이탈리아 바리 습격으로 인한 겨자 누출로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은 공통적으로 백혈구의 수치가 급격하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사실이 미국 의학계에 알려지게 되고 예일대학 교수들은 이를 토대로 연구한 끝에 최초의 항암제가 탄생하게 된것이다.